성 경 : 예레미야 23장

제 목 : 참 목자와 거짓 목자


 

  1. 거짓 목자와 참 목자 : 1~8

『 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목장의 양 무리를 멸하며 흩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 2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내 양무리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아보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인하여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내 목장의 양 무리를 멸하며 흩는 목자"란 하나님의 백성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다(왕, 방백, 제사장, 선지자). 그들은 "목자"라는 선한 간판을 달고도 "양을 흩는" 악행을 저질렀다. "양무리를 몰아내고 돌아보지 아니함"은 백성을 잘못 지도하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켜 나라 전체를 이방국가로 쫓겨나게 만든 악행을 말한다. 이들은 또한 교세를 이루어 참 선지자의 발붙일 곳을 없이 하고, 환난을 앞둔 백성에게는 ' 평강하다'는 마취제를 놓아 망하게 하였으며, 뒤로는 갖가지 우상숭배를 행하면서도 성전에 나아와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하고 부르짖던 자들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집을 맡은 자들이 사단의 종이 될 때 다스림을 받는 백성 전체가 먼 이방 나라로 쫓겨남을 당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오늘날도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지 못한 자들의 설교로 인해 많은 양 떼가 '후 3년 반'으로 쫓겨들어가 멸망케 될 것을 생각할 때 우리가 어찌 불타는 마음으로 다시 예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망하게 될 자들을 향해 나팔을 불지 않으면 그들은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값은 파수꾼에게서 찾겠다 말씀하셨음을 기억하자(겔 3:18,20, 33:6,8).

33:11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아멘, 그렇게 하겠습니다.


『 3 내가 내 양무리의 남은 자를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내어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4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축이 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남은 자"란 바벨론의 포로기간 70년이 차면 돌아올 『스룹바벨 단체』를 말한다. 성경에 기록된 '남은 자'에 대한 예언은 인간 종말에 '3대 화'를 면하고 새 천년 안식세계를 차지할 자들이 그 주인공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3대 절기> 중 마지막 절기인 초막절의 축복을 받을 자들이다. 이 거대한 초막절 역사에 있어 선구자로 불려와 쓰임받는 종이 '스룹바벨'이요, 그가 받은 인권(印權)과 머릿돌과 다림줄에 연합된 세계적인 종들이 144,000명이다(학 2:23. 슥 4:7,10). 이들의 역사로 수많은 양떼가 큰 환난에서 나와 새 시대로 들어간다(계 7:9~17).

"두려워 하거나 놀라거나 축이 나지 아니하리라" 목자(牧者)란 양 떼에게 꼴을 먹여 평강과 안식으로 인도하는 자인데, 참 목자장(벧전 5:4) 예수님께서 붙들어 쓰시지 않는 이상은 모두 교권과 재물에 얽혀 사단의 종이 되고 말 것이다. 구약 종말을 알리기 위해 예수님이 보내신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을 비롯한 모든 소선지자들이 받은 말씀들이 이제 신약 종말에 와서 다시 예언되는 것이니(계 10:7~11),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하신 것은 주 재림기를 당한 이 때의 종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거짓 선지자가 판을 치는 것은 구약 종말과 같은 영계적 흑암이 온 지구 땅을 덮었기 때문이다. '빛'은 '밤'에 필요하다. 고로 '영적인 밤'에는 '영적인 빛'이 필요한 것이다. 사단이 내어보낸 흑암을 뚫을 만한 빛은 예언의 등불뿐이다(마 25:1~10). 그러므로 '기름'을 예비하라는 교훈을 주신 것(마 25장)은 예언서를 깨닫게 하시는 '일곱 영'의 성령과 동행하라는 뜻이 된다. 9가지 은사의 자랑으로는 누구도 종말의 흑암을 뚫을 수 없다.

신랑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다 지쳐 졸며 자던 열 처녀(기독교)!  왼편의 다섯이 쓰러진 것은 '예수님의 피'가 없어서란 말인가? 아니다! 예복을 입고 신랑을 기다린 것을 보면 저들도 분명 예수 피로 거듭나서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던 자들이다. 그런데 어이하여 잔치문 밖으로 쫓겨났단 말인가? 바로 예언의 등불(벧후 1:19)을 밝힐 충분한 기름을 준비치 못했기 때문이다. 마태~유다서까지는 밝았으나, 계시록과 예언서에 무지했다는 것이다. 구약을 추억하자! 문설주에 피 바르고 홍해를 지나갔던 이스라엘! 그들이 양의 피로 죽음의 신을 이기고 홍해를 갈라 출애굽하고도 어찌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일까? 그것은 모세가 산꼭대기에 올라가 받아 온(계 5장의 인권인수를 예표) 율법(법궤)에 순종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림자(구약)를 살펴보면 실물(종말)이 보인다. 오늘날의 성도들이 예수님 피 바른 것에 만족하여 그분이 피로 산 법궤(계시록)를 무시한다면 새 시대(가나안)에 갈 수 없다.

요한계시록에 율법과 시편과 선지자의 글(눅 24:44)을 타서 꿀같이 먹으면 여호수아, 갈렙과 같은 영계가 되는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나머지 10명의 정탐꾼의 영계로 떨어져 출애굽을 하고도 다시 애굽행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종말을 비추어놓은 율법서의 교훈이다. 광야에서 멸망한 그들도 모두가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이었음을 기억하라.

말세에 두 증인의 계통인 144,000명은 계 14:4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이다. 그러나 이들을 대적하는 지도자, 성도들은 민 14:4 "한 장관"(=작은 뿔)을 따라가게 된다. 영적으로 애굽행을 택하는 것이다. <평화공존, 탈냉전, 세계정부, 종교단일화> 등의 모토는 하나같이 애굽을 사모케 하는 뱀 혓바닥에서 나오는 소리들이다. 요약컨대 오늘날 예수 믿는 20억의 인구 중에 144,000명과 그들이 인도해 들이는 흰무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미련한 5처녀가 되고 만다는 결론이다. 지금은 은사로써 역사할 때가 아니다. '남은 꼴', '남은 물'(겔 34:18)인 새 일을 무장한 자들만이 역사할 수 있는 시대이다. 예수님처럼 "기록되었으되"(마 4:4,7,10)라고 외치지 않으면 마귀의 미혹을 이길 수 없는 때이므로 은사의 효력은 점점 걷히우게 된다. 기록되었다는 건, 인간 종말에 되어질 일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계 10:7)에 빠지지 않고 적혀 있다는 뜻이다(사 34:16).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이 바로 지혜로운 처녀들만이 예비했던 '여분의 기름'인 것이다. 아멘!


『 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6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

다윗의 족보에서 "한 의로운 가지"이신 예수님이 탄생하시어 세계적인 영적 이스라엘을 일으켜 천년왕국을 이루신다는 예언이다. 초림의 예수님은 십자가로 승리하시고 승천하셔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다. 지금은 승리하신 예수님께서 영광의 몸으로 다시 오실 때이니, 그분이 피로 사서 열어주신 말씀에서 진액을 받지 못하고 있다면 포도나무 가지라 할 수 없다. 구약 때와 같이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활동하는 때가 지금이다. 고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뿌리로 하여 돋아난 '한 가지'에서 거짓 선지자들과 싸워 이길 '순'이 돋아나게 하시는데, 이것이 스룹바벨 순의 역사이다. 택한 종들(144,000)은 모두가 '순'으로서 양 떼를 살려 1,000년 안식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로 인도한다.

하나님은 구약 때 스룹바벨 총독 휘하에 약 5만 명의 순과 같은 백성들을 붙여 고토(故土)로 인도하셨다. 이 모습 그대로 신약 종말에도 스룹바벨 총독의 역사로 전 세계의 남은 자들을 모아 새 시대로 이끄실 분은 하나님이시다(다시 예언함으로 학개, 스가랴서 대폭발). 이 일의 성취를 위하여 스룹바벨의 손에 맡겨주신 축복(福)이 3가지 있으니, 곧 다림줄(슥 4:10)과 머릿돌(슥 4:7)과 하나님의 인(印)이다(학 2:23). 이 역사는 현재 성취-진행 중에 있으며 대한민국 땅으로부터 구김살 없이 이루어져 전 세계로 확장될 것이다. "일어나 빛을 발하라"(사 60:1~) 하신 역사는 대한민국의 스룹바벨 역사로부터 일어나는 백마 2차 승리의 영광을 뜻한 것이다. 예언서에 무지하여 이 비밀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미련한 5처녀>와 같이 주님을 기다리다가 쫓겨나는 비극을 당하게 될 것이다(마 25:1~).  


『 7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8 이스라엘 집 자손을 북방 땅,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 것이며 그들이 자기 땅에 거하리라 하시니라 』

여기에 나온 맹세(언약)는 두 가지이다.

유월절로 치고 나온
모세의 출애굽 역사! - 이 역사는 400년 연대와 관련이 깊은 것으로, 신 18:15절에 예언한 것처럼 말라기 때 성전 문을 닫고서 400년 만에 예수님이 찾아오심으로 영혼 구원을 이뤄주실 것을 예표하였다. 마태복음에서 유다서까지의 내용은 모두 유월절 양 예수님(고전 5:7)의 영혼구원의 역사를 기술한 것이다(히 10:1).

출바벨론 역사 - B.C. 536년에
스룹바벨이 바벨론으로부터 '남은 자'를 데리고 가나안 고토로 귀국한 역사로서 70년 회복의 역사이다. 북방 땅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돌아온 구약의 출바벨론 역사는 인간 종말에 가서 새 일(렘31:22) 역사로 전 세계의 남은 자가 에덴동산(천년왕국)을 차지할 것을 예표하였다(사 46:10).

모세 때의 출애굽 역사가 예수님의 유월절 역사(고전 5:7)로써 참되게 형상화되므로 죄로 죽은 우리(이방)가 살아 값없이 "이스라엘"이 되었다(영혼구원). 이제 "이스라엘" 된 우리에게 구약 때와 같은 출바벨론 역사가 다시 한 번 참되게 이루어져 지상천년안식의 완전한 영육구원을 얻게 되면 성경 기록의 목적이 달성된다. 7~8절 본문에서 출애굽 역사보다 출바벨론 역사가 강조된 것은 예레미야 서책은 죄인 불러다 이스라엘 만드는 책이 아니라, 이미 영적으로 출애굽하여 이스라엘 된 성도들에게 "고토(천년왕국)에 들어가라"는 목적으로 주신 책이라는 것이다. 영혼구원의 출애굽 역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루어진 사건이나, 이제는 그 피로 사신 말씀이 이루어질 때라는 것이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 24:45~46) 하신 것은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그 엑기스인 "요한계시록"을 다시 전하는 자들이 주님과 함께 새 땅에서 왕권의 축복을 차지한다는 말씀이다. 이 때가 되면 사악한 종교지도자가 많이 나와 다시 예언하는 일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2. 거짓 선지자와 제사장의 사악 : 9~22

『 9 선지자들에 대한 말씀이라 내 중심이 상하며 내 모든 뼈가 떨리며 내가 취한 사람 같으며 포도주에 잡힌 사람 같으니 이는 여호와와 그 거룩한 말씀을 인함이라 』 

9~22절까지는 거짓 선지자에 대한 경고이다(5:31, 14:13~18, 26:7~11, 28:1~17, 29:20~32, 37:18~21). 이 경고를 행하면서 예레미야의 마음이 "상하며 뼈가 떨리며 취한 사람 같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예레미야에게는 거짓 선지자들의 죄행(罪行)에 분노하신 하나님의 진노 영감이 임해 있다(10절).
둘째, 그들로 인해 미혹된(사 9:16) 자기 백성이 당하게 될 수난(受難)이 너무도 비참하고 무서웠기 때문이다.


『 
10 이 땅에 행음하는 자가 가득하도다 저주로 인하여 땅이 슬퍼하며 광야의 초장들이 마르나니 그들의 행위가 악하고 힘 쓰는 것이 정직하지 못함이로다 』

구약 때와 같이 종말에도 영적으로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들, 곧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을 따라가는 배교의 무리가 기독교 내에 많아질 것을 예언했다(약 4:4, 계 17:1~6).

"땅이 슬퍼하며 광야의 초장들이 마르나니" 이것은 한재로 인하여 초목이 말라 버린 비참한 사실을 가리키는데(14:1~9 참조), 인간 종말에 판치는 거짓 목자들로 인해 교회에 이슬 단비가 그치며 푸른 수목 같은 생명의 활동이 수그러 들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들의 행위"란 그들이 달음질하는 향방(向方), 곧 활동하는 목적을 가리킨다. "그들의 힘 쓰는 것이 정직하지 못하다"고 하셨으니 그들이 악행하기에 용감했다는 뜻이다(9:2). 교회의 영계가 이러하므로 하나님의 벌을 면하기 어렵다는 이 심판선고는 예레미야를 대하던 당대의 교회에나, 예레미야서를 대하는 현재의 교회에나 동일하게 적용된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선지자와 제사장이 다 사특한지라 내가 내 집에서도 그들의 악을 발견하였노라 』

이 시대가 그렇다는 것이다. 정직해야 할 종교지도자들이 "사특"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 안에 사단이 침투했기 때문이다. 요 8:44 "너희(유대인 및 교권)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예레미야 때나, 예수님 때나, 재림의 주님을 영접할 현 시대나, 사단의 교회침투는 계속되다가
아마겟돈 때에 가서야 용이 잡히므로 선악 간의 영적 대전쟁은 종결되게 된다(계 20:1~3). 예수님 당시 하나님의 성전이 사단의 앞잡이들로 꽉 차게 되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을 도적의 소굴로 만든 장사꾼들을 책망하시며 성전을 청결케 하셨다(요 2:13~).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또 요 12:12절과 마 21:1~ 내용과 같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사 두 번째로 성전을 성결케 하시기 위하여 성전에 들어가시어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셨다.

기도하는 집(사 56:7)인 하나님의 성전에 우상(탐심)이 들어와 판을 치게 된 것은 지도자들의 타락에 그 원인이 있다. 지금도 무신론 정권의 앞잡이가 된 거짓 목사들이 버젓이 강단에 서서 설교하고 있으니 이 기괴한 모습은 구약 때와 다를 바 없다. 명동 성당에는 중이 와서 설교도 하며, 순복음교단 조목사는 불교대학에 초청받아 다음과 같이 강연하기도 하였다.

강연에서 주목할 만한 발언들

1) 토론이라는 것은 정반합을 이루는 것이지만 대화라는 것은 서로 상호 간의 차이점을 인정하면서, 서로 이해를 돕고 화해하고 협력을 증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많은 <기독교와 불교 혹은 카톨릭교, 이슬람교라도 대화를 통해서 우리가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화해하고 협동하고 해서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 <종교는 불교나 기독교나 마호멧트 교나 평등합니다> 저는 불교집안에서 태어나 기독교목사로 있으니까 선불교랑 같은 것이 너무 많아요. <내 마음이 부처>라는 것도 <예수님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마라 예수님은 네 마음에 있다> 저 죽어서 서방정토세계가 아니라 지금 내 마음 속에 천당이 이루어져야지 죽고난 다음에 천당을 바라지 마라 또 계율과 율법을 가지고 하면 전부 죄밖에 드러나지 않는데 믿음으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고 난 다음엔 그 다음엔 자동적으로 믿음에 따라서 마음이 뜨거워지면 율법과 계율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원효사상을 좋아하는 것은 나무아미타타불 네 글자를 외움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그 다음에 계율을 지켰으니 계율도 지키고 신앙생활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통하는 점이 많아요

3) 저는 불교 TV를 굉장히 좋아해요, 왜냐하면 불교를 내 친정집같이 생각이 되기 때문에 그 강의를 들으면 굉장히 마음속에 유익을 많이 얻어요. 그래서 불교강의를 들으면 어떤 때는 너무 난해하기 때문에 알아듣기가 굉장히 힘들게 강의하는 어른들도 있었어요. 복잡하게 철학적으로 계율적으로 하시는 강의를 들으면서 제가 안타까운 적이 있었어요. 내가 듣기로도 이렇게 복잡한데 일반 중생이..., 이걸 깨달은 저는 정병조 교수님의 전 시리즈를 다 들었습니다. 책으로, 텔레비전으로 다 들었는데 그분 강의를 내가 왜 좋아하냐면 쉽게 해요. 제가 왜 불교강의를 열심히 듣냐면 불교강의를 들음으로 비추어볼 때 내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깊이를 더 깨달을 수 있어요. 그런 점에서 종교간의 대화가 필요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참석자들 박수...)


질문 1)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구요, 소망이 있으시다면?

조용기 목사 : 오늘날 불교나 기독교가 더 열심히 전도해서 우리 한국의 불교나 기독교의 지배종교가 지배한다면 지배문화를 만들어서 그 문화 속에 윤리, 도덕이 서고 인생관과 철학이 서고 생활가치가 설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에는지배종교가 없어서 아무리 정부에서 어떤 시책을 세워도 국민이 잘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불교가 왕성해야 되겠고 기독교가 왕성해야 되겠고 불교와 기독교간에 긴밀한 대화를 해야 하겠습니다. 상대의 차별성을 인정하면서도 대화를 통해서 서로 화해하고 협력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앞으로 저는 하나님이 긴 생명을 주신다면 해외로 나가서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더 많은 토론, 대화 문화를 형성하고 싶습니다. 저는 지금 생각에 '한 박사님'도 기독교모임에 모실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부처님의 자비 하나님의 사랑, 말이 자비고 사랑이지 실천에서 보면 자비나 사랑이나 똑같은 맥락에 하나로 통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대화를 통해 대화와 협력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질문 2) 제가 한 20년 전에 당했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학생이 예수밖에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길래 너희 목사님한테 물어보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물어봤다구 와서는 그 얘기를 또 합니다.


조용기 목사 : 그렇습니다. <불교가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로서 장자종교입니다> 불교가 만약에 차별성을 인정하지 않고 독선주의로 나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목사님들이 그 종교의 특수성 그 차별성을 인정하지 않고 유아독존적으로 생각하므로 많은 분쟁이 생길 요인이 있기 때문에 제가 은퇴를 하고 나서는 더 많은 대화를 통해서 이해와 화해의 길을 모색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종교는 평등합니다. (참석자들 박수)


질문 3)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 목사님의 말을 기독교외 예수님, 하나님 외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로 생각해도 되겠는가?


조용기 목사: 저는 그 차별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교는 불교의 구원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기독교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 한계를 불교도 뛰어 넘을 수 없고 기독교도 뛰어 넘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차별성을 인정을 하고 대화를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불교가 주장하는 것을 비판할 수 없습니다. 그런 권한이 없어요. 불교는 불교대로 존중을 하고, 인정을 하고, 기독교는 기독교대로의 구원의 방식을 존중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종교라는 평등한 공통분모에서 <차별성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 가자>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집안에서도 우리 집안 식구들 중에도 아직도 불교를 믿는 가족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서로 아무런 저항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서로 차별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동생은 불교를 통해서 구원을 받겠다고 확신을 믿기 때문에 존중하고 인정하고>, 나는 기독교 목사니까 기독교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을 인정하고 <내 것만 절대 진리라고 인정할 수 없습니다>. 너는 죽이고 나는 살겠다 그렇게 되면 상생(相生)의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것은 부처님도 예수님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비와 사랑의 원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합니다.


목사의 직분을 가진 자가 구원 문제를 전함에 있어 '부처가 원하는 바'를 창조주시며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원하시는 바'와 동일선상에서 언급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부처는 자기 죄 중에 죽은 자요, 예수는 죄없는 분으로 죄인을 위해 대신 죽어주신 분이 아니던가? 75만 성도를 먹이는 교회 목사의 발언수위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면, 우리는 대한민국 교회의 영계를 크게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한국 교권에서 조 목사의 이러한 발언을 지켜보고도 누구 하나 공개적으로 따끔한 충고를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솔로몬 성전을 심판하신 주님이 초림주로 오셨을 때 헤롯 성전의 유대교권을 심판하셨다. 유대교권을 심판하신 초림주께서 다시 오실 때에도 심판의 원리는 동일한 것이다. 포도나무의 가지가 되어 있찌 못한 자들은 잘라내어 불에 태운다는 것이다(마 3:12. 요 15:6. 사 5:4~6. 겔 15장). 아무리 당신의 '피로 사신 교회'라도 선지서를 통해 "이러한 자들은 망하리라" 하고 알려주신 이상, 그대로 행하지 않는 교회는 가차없이 심판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교권이나 특정 목자를 의지할 때가 아니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예언서만을 바라볼 때이다! 예언의 말씀으로 이쁘게 단장하고 신랑을 기다리지 않으면 이전에 갖춘 치장(은사열매)이 아무리 화려하다 하여도 '후 3년 반'에 떨어져 짐승에게 실컷 강간당하고 그 치마가 들려 벌거벗겨진 채 불태움을 당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마귀의 밥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비겁한 음녀신앙을 가진 자들의 최종 운명임을 우리는 현실 기독교계에 목숨바쳐 전하자(렘 4:39, 13:26. 애 1:8~9. 계 17:16). 그것이 진정한 파수꾼이다!


12 그러므로 그들의 길이 그들에게 흑암 중에 미끄러운 곳과 같이 되고 그들이 밀침을 받아 그 길에 엎드러질 것이라 그들을 벌하는 해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거짓 선지자의 앞길은 흑암의 길이 되리라고 예언하셨다(사 59:9~15). "흑암"은 사단의 역사인데 종말에는 계 13장 예언대로 1,260일(42달)간의 어두운 수정통치(獸政統治) 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일단 이곳에 빠지면 육체구원이 없게 된다. 짐승 앞에 경배하지 않으면 몇이든지 죽이는 시대이기 때문이다(계 13:15). 구약이라는 것은 무엇이든 종말을 미리 보여주는 역사이므로(롬 15:4), 바벨론 포로기간의 비참함은 인간종말의 수정통치 세계의 비참함을 앞당겨 보여준 것으로 보면 된다. '후 3년 반'은 마귀가 극도로 발악을 하며 주인이 되어 버린 내놓은 흑암세계이지만, 지금은 마귀가 빛을 가장하여 활동하고 있는 영적 흑암기이다. 때문에 교회는 마귀의 이중적인 혀를 분별 못하고 심히 놀아나고 있는 상태이다. 이것을 예수님은 "졸며 잔다"고 말씀하셨다(마 25:5). 이러한 흑암(미혹)을 분별하라고 '다림줄'을 스룹바벨의 손에 맡겨 주셨으니, 순종하면 빛의 세계로! 불순종하면 "그들을 벌하는 해"로 정하신 '후 3년 반'에 떨어지는 것이다.  


13 내가 사마리아 선지자들 중에 우매함이 있음을 보았나니 그들은 바알을 의탁하고 예언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그릇되게 하였고 14 내가 예루살렘 선지자들 중에도 가증한 일이 있음을 보았나니 그들은 간음을 행하며 행악자의 손을 굳게 하여 사람으로 그 악에서 돌이킴이 없게 하였은즉 그들은 다 내 앞에서 소돔 사람과 다름이 없고 그 거민은 고모라 사람과 다름이 없느니라 』

사마리아와 유다의 부패 실상을 지적하고 있다. 북쪽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왕의 그릇된 종교 운동(왕상 12:27~33)을 위시하여 협상주의의 길로 탈선해 바알신과 타협했다. 남쪽 유다도 동일한 죄악을 범하다가 북방 칼을 맞고 이방 땅에 잡혀갔다. 이와 같이 인간 종말 21세기에도 세계의 영적 이스라엘이 이방과의 협상노선을 걷고 있는데, 정치적으로는 <평화공존, 세계단일화정부> 운동이요, 종교적으로는 <에큐메니칼, 종교일치운동>이다(W.C.C.와 로마가톨릭 노선). 구약 교회가 우상과 간음할 때마다 여지없이 북방환난을 당하게 된 것을 볼 때, 종말에도 마귀가 이용하는 교회(음녀)의 설교(쑥물)를 따라가게 되면 이 시대의 심판도구(북방 러시아)에 의해 철저히 매를 맞을 것이다. 고로 창세이래로 없던 대전쟁과 그로부터 이어지는 '후 3년 반'을 지배할 주체세력은 북방임을 알 수 있다(마 24:21, 욜 2장 , 단 12:1~2). 그곳에서 표를 받으면 '3년 반'은 살 수 있으나 파리 목숨에 지나지 않는다. 주의 재림날(아마겟돈)에 한줌의 재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15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내가 선지자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물을 마시우리니 이는 사악이 예루살렘 선지자들에게로서 나와서 온 땅에 퍼짐이라 하시니라 』

"쑥과 독한 물을 마시우리라" 이는 예루살렘 선지자들에게 미혹의 영을 허락하셔서 쑥물을 내뱉게 하시겠다는 것인데, 이처럼 사악을 내뿜는 종말의 거짓 선지자의 활동도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옛 뱀(사단)을 창조하여 에덴에서부터 각 시대별로 적절히 들어 쓰심은 이스라엘 백성이 공의의 하나님께 순종하는지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자기 선수를 씨름판 위에 올려보낸 코치가 상대 선수가 강하다 하여 자기 선수를 붙잡아 주려고 씨름장에 올라간다면 공의(公義)가 아니다. 일단 싸움이 시작되었다면 코치는 지켜볼 뿐이다. 씨름판에 한 발자국이라도 올려놓으면 그 순간 선수는 코치에 의해 실격을 당하고 만다. 하나님은 홍샅바를 맨 거짓 선지자들과 청샅바를 맨 예레미야를 붙여 놓으시고는 예레미야가 쓰러져도 예레미야를 응원한 자들을 승리자로 인정하겠다는 법을 세우셨다. 그를 응원했던 자는 '바룩'과 구스인 '에벳멜렉' 등의 한 두 명뿐이었고, 다수는 홍샅바 편에 서서 예레미야를 조롱하였다.

모세 때에도 '거짓 선지자'를 일으켜 믿음의 여부를 알아 보신다고 하셨고(신 13:1~5), 사 51:17절 이하에도 예루살렘에 '분노의 잔'(=쑥물)을 마시운다고 하셨으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동일하다. 다섯째 나팔이 불리우면 무저갱에서 흑암의 연기가 나와 해와 공기를 어둡게 하는데(계 9장), 연기 가운데서 황충 떼가 일어나 하나님의 인(印)을 맞지 못한 종만 해한다는 것을 보면 이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법이다. 즉 종말의 싸움승패는 '하나님의 인'을 소유하였느냐의 여부로 결정되는 것이다. 쭉정이는 거짓 선지자를 따라 바벨 편에 서서 '하나님의 인'을 반대할 것이고, 알곡들은 계시록과 예언서로 척량받아 이마에 인을 맞고 스룹바벨과 함께 진리 편에서 승리할 것이다. 분노의 잔(쑥물)은 쭉정이를 모으는 악의 타작기계요, 하나님의 인은 알곡을 모으는 의의 타작기이니, 스룹바벨과 영적으로 친구가 되느냐 마느냐로써 마지막 타작마당의 알곡과 쭉정이가 갈라지는 것이다(학 2:23. 슥 4:7~10절을 참조하라).


『 
1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17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18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예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 』

거짓 선지자는 언제나 평화공존(6:14, 8:11)을 외친다. 하지만 이들의 "평안"은 헛된 것이다. 그들의 말이 헛됨은,

① 사단에게 속한
인본주의 사상으로 말하기 때문이다(16절). 인간의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라(렘 17:9) 하셨으니 인간의 말은 믿을 바가 못된다.

② 예례미야를 대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로 더욱 죄짓도록 조장하는 자들이었으며(17절), 하나님 뜻에 반대되는 길로 백성을 인도했다. 예레미야는
"너희가 회개치 아니하면 전쟁의 화를 당하리라" 하며 북방환난을 외친데 반해, 그들은 "너희가 평안하리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며 도리어 예레미야를 옥에 가두고 때렸다(20:2~3, 32:5, 37:15). 악(惡)에게 속한 자들은 언제나 폭력을 휘두르며 남을 압박하는 편이나, 의(義)에 속한 자는 매를 맞고 조롱받으며 끝까지 인내하는 편이므로, 나타나는 열매를 보아도 그들이 말하는 "평화"는 거짓 평화임이 분명하다..

③ 거짓 선지자는 여호와의 회의에 참예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22절). 이들은 사단의 회의에 참예하는 마귀의 앞잡이다. 계 13:11절을 보면
"땅에서 올라온 뿔 달린 새끼양"이 용처럼 말을 하고 있는데, 이는 양처럼 교회 안에 섞여 들어와 용(사단)의 말을 대언하는 거짓 선지자의 정체를 폭로한 것이다.


『 
19 보라 나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과 회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20 나 여호와의 노는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 』

거짓 선지자들이 받을 벌에 대한 예언이다. "나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과 회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고 하셨으니 거짓 선지자의 교만은 반드시 파쇄(破碎)될 것이다. 옛날이건 지금이건 평화를 외치는 자는 100% 거짓 선지자이다. 끝까지 전쟁이 있으므로(단 9:26), 또한 심판이 있고 평화가 있다 하셨으므로(사 2:4, 32:14~19) 심판과 화(禍)를 말해야 참 선지자이다. 참 선지자란 이스라엘이 율법에서 어긋난 길을 갈 때 그 잘못을 깨닫게 하려고 하나님이 당신 대신 보내신 대언자이다. 고로 그 사명상 평안을 말할 수 없다. 즉, 유다 민족에게 평안함이 보장되어 있다면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실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선지자가 왔다는 건 심판을 경고하기 위함이며, 듣기 싫은 소리를 하기 위함이다. 선지자는 언제든지 조건부 재앙을 선포할 수밖에 없는 자이다. 선지자들이 나타난 시대는 죄악이 관영한 시대이며 큰 환난을 앞둔 시대이다. 2,000년 기독교의 역사상 선지서가 이처럼 밝아진 때는 없었다. 지금은 큰 환난을 앞둔 시대라는 뜻이다.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리라" 기록된 대로 외칠 사명자에게는 읽으며 들을 때마다 하나님의 비밀이 밝아지겠지만, 거짓 선지자들은 회리바람에 날아가고 그 머리가 깨질 것이다. 평화로운 새 시대가 창조되기 이전에 이 땅의 거짓 선지자의 교만을 완전 심판하시겠다는 뜻이다. 거짓 선지자는 진리를 반대하지만 강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쉼 없이 이루신다 (사 7:10~15. 렘 30:24).

"너희가 말일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 인간은 어리석어서 영계적으로 작정된 경영을 모른 채 제 멋대로 살아왔지만 진노의 날이 오면 완전히 깨닫는다는 것이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3:37)" 노아 때에도 방주건축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업임을 깨닫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비 오기 전까지는 모두 조롱, 멸시만 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노아가 하나님이 쓰신 참 선지자였음을 완전히 깨닫고 사망하였다. 우리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3대 화의 재앙이 터져야만 신,불신 세계가 다 함께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닫게 된다(계 8:13). 우리 앞에 갈림길이 있다. 크게 얻어 터지고 깨닫는 '후 3년 반' 행을 선택할 것이냐? 매맞기 전에  깨닫고 증거하다 순교하는 '전 3년 반' 행을 선택할 것이냐? 이것이 문제이다. 죽기까지 증거하는 것은 승리하고 올라가는 길이요(계 11:1~12, 12:5), 올라가진 못하지만 새 시대를 차지하는 길은 증거자의 말을 듣고 예비처로 들어가는 길이다(계 12:6).


21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22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예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

거짓 선지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지를 지적하는 동시에, 그들의 노력이 헛된 것임을 예언하셨다(22절).

 

  3. 거짓 선지자가 받을 형벌 : 23~32

2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 데 하나님이요 먼 데 하나님은 아니냐 (KJV 23 주가 말하노라. 내가 가까이에서만 하나님이요, 멀리서는 하나님이 아니냐?) 2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25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몽사(夢事)를 얻었다 몽사를 얻었다 함을 내가 들었노라 』 

계속하여 거짓 선지자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신다(딤후 3:13). 거짓 선지자는 "몽사를 얻었다 몽사를 얻었다" 하며 사람들을 속이는 자이다. 이는 기록된 말씀만이 진리이지 몽사를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다(신 13:13~ ). 마 26: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예수님이 이 길을 가셨으니 우리 역시 여호와의 책에 기록된 대로 걸어갈 뿐이다. 그길만이 3대 화를 피하여 새 시대까지 이르는 길이다(고전 4:6 참조).


『 
26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 27 그들이 서로 몽사를 말하니 그 생각인즉 그들의 열조가 바알로 인하여 내 이름을 잊어버린 것같이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 』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은 그들의 "마음의 간교한 것" "몽사"로 성립된다. 그들의 특성을 살펴 보면,

① 그들은 몽사를 얻지 못하고도 몽사를 얻었다며 속여서 증거한다. 이러한 고의적인 속임은 거짓말로서 사단의 열매이다(요 8:44).
② 혹 그들이 실제로 몽사를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고 탐심에서 나온 그들
"마음"의 산물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일이 많아 생각이 복잡해지면 몽사를 얻게 된다(전 5:3).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계시 받기를 지나치게 원한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완전계시와 완전영감으로 남겨주신 '성경'을 등한히 여긴다는 뜻이 된다. 이러한 습성은 재앙을 받을 조건이 된다(계 22:18~19). 우리가 확실히 알 것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잊게 하거나 등한히 여기게 하는 '새로운 운동'들은 모두가 다 진리에 속하지 않는 '헛된 것'이라는 점이다(렘 26:2~ , 고전 4:6, 계 22:18~19).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던 율법시대(1,500년간)가 끝나고(눅 16:16),
새 언약(렘 31:31)의 빛이 비추어져 나갈 때 많은 영혼들은 죄를 사함받아 '하늘 시민'이 되었다(2,000년간). 이제 '하늘 시민'이 된 자들이 새 언약의 바탕 위에 새 일(렘 31:22)까지 순종하여 예언의 등불을 세계적으로 증거하면 많은 양 떼가 큰 환난으로부터 육체를 보호받고 재림 예수님이 통치하시는 '지상에덴'의 기쁨을 만끽하게 된다. 그러나 기록된 이 말씀을 거절하고 배반한다면 칼에 죽는다 하셨다(사 1:19~20). 앞으로는 "기록된 말씀"대로 하자는 노선과, "몽사"의 노선이 크게 충돌할 것이다.


『 
2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 2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몽사는 쭉정이 "겨"요, 하나님의 말씀은 성실한 알곡 "밀"에 비유되었다. 말씀은 모든 악을 소멸시키는 권세의 "불"이며, 견고한 반석이라도 쳐서 부수는 철장권세의 "방망이"이다.


『 
3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적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그들이 혀를 놀려 "그가 말씀하셨다" 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거짓 몽사를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이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거짓 선지자가 받을 벌에 대한 계속적인 예언이다. 여기서만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란 말씀이 3번 나오고 "치리라"란 말씀이 3번 나왔다. 이렇게 힘주어 말씀하심을 보아서도 우리는 말씀을 바로 전하지 못하는 '가감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를 뼈저리게 느껴야 한다.

"서로 내 말을 도적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참 선지자가 받은 말씀을 (친구들을 통하여 비밀히) 얻어가지고 자기의 거짓된 사상(거짓말)과 섞어서 제 것인 양 사용하는 무리들은 "치리라" 말씀하셨다. 오늘날도 이뢰자 목사에게 밝혀 주신 요한계시록 해석과 동방역사 새 일의 비밀을 자기가 기도하다 받은 듯 속이고 있는 목사들이 많은 줄 안다. 회개치 못하면 예레미야서가 권세로 나가는 날 하나같이 거꾸러지고 말 것이다.

"혀를 놀려 그가 말씀하셨다 하는 선지자들" 제 생각에는 "그가 말씀하셨다"고 하면 권위가 설 줄 알았던 게다. 하지만 하나님은 정직하지 못한 이런 자들에 대해 "내가 치리라" 말씀하셨다.

 

  4. 참 선지자의 말을 무시하는 자가 받을 형벌 : 33~40

『 33 이 백성이나 선지자나 제사장이 네게 물어 이르기를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 무엇이뇨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엄중한 말씀이 무엇이냐 하느냐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버리리라 하셨고 34 또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하는 선지자에게나 제사장에게나 백성에게는 내가 그 사람과 그 집에 벌하리라 하셨다 하고 』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 무엇이뇨" 그 당시의 방백과 백성들이 예레미야를 찾아와 습관처럼 묻던 무시와 조롱 섞인 말이다. 선민이라는 자들이 말씀 받은 선지자의 마음을 이토록 괴롭게 했던 것이다. "엄중한 말씀"이란 '무거운 짐'이라는 뜻이다(히브리 원어로 '맛사'). 이 말에는 "오늘은 또 무슨 재앙을 선포하나 보자" 하는 그들의 관심 반, 조롱 반의 태도가 배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는 않으나 어수선한 시국에 장래와 민족의 앞날이 궁금하니 선지자를 점쟁이 정도로 취급하여 묻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내가 너희를 버리리라"라는 단호한 말씀이었다.


『 
35 너는 또 말하기를 너희는 서로 이웃과 형제에게 묻기를 "여호와께서 무엇이라 응답하셨으며 무엇이라 말씀하셨느뇨" 하고 36 다시는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말하지 말라 각 사람의 말이 자기에게 중벌이 되리니 이는 너희가 사시는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망령되이 씀이니라 하고 37 너는 또 선지자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무엇이라 대답하셨으며 여호와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느뇨 』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예레미야를 대할 때 취했어야 할 올바른 태도를 알려 주신다.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는 말 속에 섞인 조롱의 태도를 버리고 물으려거든 겸손한 자세로 "여호와께서 무엇이라 응답하셨으며 무엇이라 말씀하셨느뇨"라고 말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강퍅한 마음으로 예레미야를 미워하며 묻기를 "엄중한 말씀이 무엇이뇨" 할 것이 아니라, 회개와 순종의 태도를 보여 하나님의 긍휼을 얻으라는 것이다. 만일 이 경고를 듣지 않고 계속하여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 무엇이뇨"라고 말하면 그들의 말대로 중벌을 당하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그 종 선지자를 망령되이 대하는 것을 주께서는 용납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 
38 너희는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말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보내어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하지 말라 하였어도 너희가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하였은즉 39 내가 너희를 온전히 잊어버리며 내가 너희와 너희 열조에게 준 이 성읍을 내 앞에서 내어버려 40 너희로 영원한 치욕과 잊지 못할 영구한 수치를 당케 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

만일 그들이 회개치 않고 계속하여 조롱하는 태도를 취할 경우 당하게 될 결과를 예언하셨다. 그리할 때의 결과는 ① "그 민족을 온전히 잊어버리며", "그 성읍을... 내어 버려", ② 그 민족으로 "영원한 치욕과 잊지못할 영구한 수치를 당케 하리라"고 말씀하신 대로이다. 끝내 유대인은 겸손치 못하고 강퍅했으므로 이 글자 그대로 북방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고 말았던 것이다.

선지의 말을 무시하다 잡혀가는 교회 - 종말에 예언서를 무시한 기독교의 모습이로다! 아멘.

"내가 너희에게 보내고 부지런히 보낸 나의 종 선지자들의 말을 이미 듣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가 만일 다시 듣지 아니하면 6 내가 이 집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이 성으로 세계 열방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다 하라"는 것은 이 말씀을 다시 외쳐야 할 자들은 이 시대의 '우리'라는 것이다. 우리가 예레미야와 같이 목숨바쳐 외칠 때, 듣지 않는 걍팍한 자는 '후 3년 반'으로, 자세를 낮추어 귀를 기울이는 겸손한 자는 '새 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 주님 저희에게 양 떼를 살려주기 위한 순교자의 마음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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